희생적인 돌봄의 상징, 나이팅게일을 그 시대의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여성이었다.
백의 천사, 돌보는 천사, 등불을 든 여인으로 불리며 자기희생과 순종적이고 상냥한 이미지로 옛날에 그려졌던 나이팅 게일은 사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불편함을 넘어서 상당히 싫어했던 눈에 거슬렸던 여자였습니다. 그것은 영국 왕립 협회의 많은 연구를 통해서 알려졌는데요. 나이팅 게일은 현대 간호학, 공중보건의 시초, 통계학, 빅데이터의 시조새라고도 불리며 영국이 사랑하며, 동시에 전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영향을 준 중요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2020년 영국은 나이팅게일 생일 200주년을 맞아 헌화식,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등불행사, 나이팅게일의 생전 여름 별장이었던 더비셔 투어 등을 진행했습니다. 또한 프로렌스 나이팅게일 재단을 만들어 세계보건에 관한 회의 또한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그런 그녀는 여러 가지 전기를 통해 여성적이며 순종적인 희생의 아이콘으로 영웅적으로 그려졌는데요.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사학자이면서 나이팅게일 전기 작가 마크 보스트리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이팅게일을 그 시대의 관습에 저항했던 인물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지적으로 강력하면서 남성이나 가족과 관련되지 않은 목표를 가진 여성을 불편해합니다. 이에 관해 여성 혐오가 큰 원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이다. 옛날에도 지적으로 강력한 여성에 대한 불편해하는 모습은 여전했던 것 같다.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않았던 집요한 여성, 나이팅게일
나이팅게일은 상당히 집요한 여성이었고, 병원에 있는 군인들 조차 나이팅 게일을 환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스스로 간호사로서 자신의 권위를 단단히 했다고 합니다. 아무도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입니다. 그녀는 부유한 기독교 가문에서 자랐습니다. 그녀의 가족이 16살에 Hampshire 햄프셔로 이사 간 후, 그곳에서 그녀는 종교적 경험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운명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고, “쓸모없는 일들로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가치 있는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라고 생각하며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간호사는 하층계급 여성들만이 하는 거친 일로 여겨졌고, 부모님은 부유한 집에서 자라 결혼하길 바랐지만, 나이팅 게일만이 부모에게 반항하며 부모의 집을 떠나 유럽 대륙을 떠돌며 독일의 카이저베르트 간호학교에서 간호를 배웁니다. 이후 런던에 있던 병약한 여성들을 위한 기관 (Institution for the care of Sick Gentlewomen)의 총책임자로 일했습니다. 이곳은 주로 부유한 집의 사람들이 아닌 가정교사, 또는 매춘 여성들을 돌보는 사회에서 하층에 속하는, 남편과 가족의 그늘에서 벗어난 험한 여성들을 돌보는 곳이었습니다.
부드러움 보다는 딱딱하고 사무적이었던 사람으로 묘사되는 나이팅게일
이것은 미술 작품에서도 묘사되는데요. 1854년 러시아의 영토 확장 때문에 일어난 영국과 러시아, 오스만 제국, 프랑스가 격돌했던 크림전쟁에 나이팅 게일은 파견되는데요. 나이팅게일은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입니다.) 외각에 있었던 스쿠타리 병영병원에 가게 됩니다. 이때 활동했던 영국의 화가 제리 베럿(Jerry Berett, 19세기 활동한 역사적인 장면과 인물초상화 전문 영국 화가)은 그곳에서 [자비의 사명: 스쿠타리에서 부상자들을 돌보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을 그렸습니다. 나이팅게일에게 병자를 돌보는 것처럼 포즈를 취해달라고 부탁하지만 나이팅 게일은 거부합니다. 그래서 이 그림에서 나이팅게일은 뻣뻣하게 서있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 화가는 나이팅게일의 초상화를 그릴 때도 서둘러 그린 스케치를 바탕으로 나중에 혼자 따로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군지휘관의 반발을 샀던 나이팅게일
나이팅게일은 상관의 지시를 건너뛰고 물품을 주문하는 방식으로 지휘관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실제 기록에 의하면 크림반도의 영국군 수석 의료장교는 1854년 말 나이팅게일의 그의 권한을 무시하고 군 물자 창고에서 물품을 주문했고 그는 군 상부에 “나이팅게일은 의료부서의 권력을 얻기 위해 야심 차게 노력하며 이것은 우리 군에 해로운 권력이 될 것”이라는 보고를 하며 그녀를 권력을 얻기 위한 야심가로 보고 하기도 했습니다.
나이팅게일 처음부터 병사들의 고통을 줄이고 사망률을 효과적으로 줄이지 못했습니다. 스쿠타리 병원의 첫해 사천 칠백여명의 병사들이 사망했으며 이는 전투 부상보다는 장티푸스, 콜레라, 장티푸스열, 이질로 인한 사망이 열 배나 더 많았던 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쿠타리 병원은 당시 배수와 환기가 좋지 않아 콜레라 환자들이 많았습니다. 나이팅게일은 편지를 통해 군의관과 관리들에게 반복적으로 편지를 보내 전염 질환을 유발하는 병원 위생관리에 대해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녀는 또한 바라클라바라는 지역의 캐슬 병원에서도 고되게 일했습니다. 그녀는 깨끗한 물을 얻기 위해 시추공을 뚫고 부상당한 병사들을 겨울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펠트를 침대마다 일일이 깔고, 병사들의 식사를 개선하기 위해 매일 콘스탄티노플에서 신선한 빵을 배로 실어오게 하고 고기를 규칙적으로 섭취할 수 있도로 힘썼습니다. 또한 매일 마차, 말을 타고 또는 걸어서 끊임없이 이동하며 주변의 다른 병원을 점검했도 포병소리가 배경에서 울리는 가운데 활동했습니다. 이 시간 동안 나이팅 게일은 자신을 군대의 해악 한 권력을 잡으려는 침입자로 여긴 장교들이나 관료들의 반감을 마주 했습니다. 실제로 나이팅게일의 편지에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후 영국에서 위생위원회가 도착하고, 나이팅게일의 편지에 담긴 형편없는 위생에 대한 비판과 의심을 확인시켰고, 나이팅게일은 그런 낙후된 위생조건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결심했다고 설명합니다.
이타적인 인물로 묘사된 신문 삽화
파리조약으로 크림 전쟁이 끝나고 난 후, 1956년 7월 28일 후 그녀는 영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녀는 전쟁지역에서 총 2년을 지냈으며, 그중 7개월은 크림반도에서 있었습니다. 스쿠타리 병원에서 보낸 나이팅게일의 생생한 소식은 당시 특파원 윌리엄 하워드 러셀 경의 보도를 통해 전해졌습니다. 그 당시 뉴스 1면에 나이팅게일이 등불을 들고 병사를 돌보는 모습을 묘사한 삽화가 실리면서 이타적이고 격웅적인 인물로 대중의 눈에 각인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열광했고, 귀국 후 나이팅게일은 빅토리아 여왕 다음으로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이 되었습니다.
수집광이었던 나이팅 게일
나이팅 게일은 자신의 명성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굉장한 수집, 기록 광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지인이자 저명한 정부의 통계학자였던 윌리엄 파와 함께 콘스탄티토플의 군 병원 데이터를 수집해 그녀가 오랫동안 의심해 왔던 충격적인 사실을 현실을 문서화했습니다. 크림 전쟁에서 전투로 사망한 영국 병사들보다 질병으로 죽은 병사들이 거의 일곱 배나 많으며, 병원이 청소 된 후 사망률은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그녀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영국 본국의 군 병원에서도 데이터를 수집해, 병원의 비위생적인 환경과 과밀함 때문에 사망률이 높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이때 기록에 의하면 나이팅게일은 “우리 병사들은 병영에서의 죽음을 위해 입대한다”라고 쓰면서 비판적인 변모를 드러냈습니다. 그녀는 이를 [영국군의 건강, 효율성 및 병원 행정에 영향을 미치는 노트]라는 이름으로 출판했고, 그 속에 코코스콤(cockscomb)이라는 혁신적인 원형 그래프를 사용해 데이터를 시각적으로 제시했습니다.(아래) 파란색으로 그려진 질병이 전쟁터에서의 부상이나 다른 원인보다 영국 병사들의 행명을 훨씬 더 많이 앗아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다이어그램은 1월부터 12월까지 12개의 섹터로 나눠져 각 섹터가 한 달을 나타내며 위생 개선과 사망률 감소 간의 직접적인 관계를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이에 대해 나이팅 게일이 한 말이 참 인상 적입니다. 그녀는 “우리의 말을 통해 대중의 위에 방어막이 쳐진 뇌”로 전달되지 않는 것을 눈을 통해 영향을 미치도록 설계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나이팅게일 성격 나오네요.
이런 나이팅 게일의 발표에 설득된 군은 영국 전역의 병원의 위생을 개선하기 시작했고,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영국 의회는 런던의 첫 종합하수시스템을 위한 자금을 승인했습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통계학자이자 저자는 “그녀는 1인 압력 단체이자 아이디어뱅크였다 “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나이팅게일은 크림 전쟁에 파견된 동안 척수염에 걸립니다. 그녀는 런던의 호텔이나 임대 아파트에서 오랜 기간 병상에 누워있으면서도 쉬지 않고 의료의 모든 측면에 대한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수집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녀는 병원 관리자들에게 설문지를 보내고, 그 결과를 수집 및 분석해 보고서를 작성하고 다양한 질병에서 회복, 사망비율, 환자의 연령과 성별에 땋은 평균 회복기간, 병원직원들 사이의 높은 감염병 발생률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통계를 사용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고 기록에 남겼습니다. 그리고 1858년 그녀는 왕립 통계학회(Royal Statistical societ)의 최초 여성회원이 됩니다.
이후 1860년 그녀는 런던의 영국 의회 바로 반대편, 세인트 토마스 병원에 영국 최초의 간호사 양성학교를 설립합니다. 그녀는 이 프로젝트를 단순한 교육이 아닌 도덕적 사명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가난하고 덕망 있는 많은 여성들이 정직한 직업을 갖고 적절한 생활을 영위하며, 보호와 절제를 통해 정화되고 요양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 기록에 남습니다.
그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사회의 소외된 계층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평생 동안 여러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녀는 구빈법(Poor Law,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법)을 비판하며 의회에 빈민보호시설인 작업장을 보다 나은 시설로 개선하도록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급진적이고도 맹랑한 여성이었다고 저는 생각되는데요. 이 사회 당시에는 가난하거나 병든 사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있었음에도 그녀는 병자와 노약자를 위한 별도의 병동을 마련하고 훈련된 간호사를 배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또한 범죄, 노동, 정신질환의 사회적 원인에 대한 방대한 글을 남겼습니다. 전쟁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중립적으로 인식하고 그들과 그들을 돌보는 사람까지 전장에서 보호해야 한다는 윤리를 주장합니다. 이 윤리적 개념은 1863년 제네바에서 설립된 국제 적십자위원회(ICRC)의 핵심 원칙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나이팅게일은 순종적이고 희생적인 여성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던 것 같습니다.
나이팅게일의 개인적 삶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 그녀는 부유한 집안의 딸로 여러 번의 결혼 제안을 받습니다. 그중 귀족 정치인의 청혼 더 있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의 가문의 저택을 자주 찾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결혼 후에 겪어야 할 타협과 제약에 대해 이중적인 감정을 가졌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여성으로서 나이팅게일은 “세상에 나가 무언가를 하고자 한다면 결혼과 아이를 갖는 것은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입장을 가졌습니다. 나이팅게일의 언니 파르테노페는 나이팅게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데요 “그녀는 일반적으로 자선, 박애라는 것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그녀는 야심이 크며, 세상을 개혁하고자 한다”라고 썼습니다. 또한 소설가이자 나이팅 게일 가문의 친구였던 엘리자베스 개스켈은 1845년에 나이팅게일의 가문을 방문했을 때 나이팅게일을 보고 “사람들과의 사교보다는 인류 전체에 더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라고 말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공중 보건 캠페인을 계속합니다. 당시 사회개혁가였던 해리엇 마르티노와 함께 전염병 법(contagious disease acts)을 폐지하기 위한 운동에 참여합니다. 당시 해군기지와 군 주둔지 주변에 매춘부들은 강제로 정부에 체포되고 강제 성병 검진을 실시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성병확산의 책임은 남성고객들에게도 있다고 믿었으며, 매춘부들에게 꼬리표가 채워지는 것을 올바르지 못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이번에도 데이터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와 나이팅게일은 집요한 여자였습니다. 진짜 증거로 한방에 맥이기.. 이번에 조사를 하면서 진짜 대단한 여자라고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매춘부들의 강제 검진이 성병의 확산, 감염률을 낮추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차트를 작성했습니다. 감염을 퍼트리는 남성들은 외면한 채 매춘부들만을 강제로 체포해 강제 성병 검사를 하게 만들었던 전염병법은 결국 1886년 폐지되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엄청난 집념의 여성입니다. 1907년 나이팅게일은 영국 왕 에드워드 7세에 의해 만들어진 공로훈장(Order of Merit, 그 당시 최고의 영예 중 하나)을 받은 첫 여성이 됩니다. 그녀는 최고 훈장을 받은 후 자신에 대한 명성에 대해 일기장에 상당한 불편함을 표시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해 선을 행한다”라고 말입니다. 그녀는 3년 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이팅게일이 떠난 지 100년도 훨씬 넘은 지금 그녀가 했던 일은 지금 현시대에도 남아 여러 사람들을 살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큰 저택에서 하인들을 거느리며 사회생활을 할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부유한 가문의 모든 것이 그녀를 위해 준비되고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에 저항하고 더 높은 소명에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집요하고도 확실한 방법으로 전 생애에 걸쳐 한결 같이 장벽을 허물어 갔습니다. 여러분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이팅게일이 결혼도 안 하고, 매춘부들을 돌보고 오히려 남성에 의해 감염되는 점을 꼬집으며 사회정 통념을 깨고, 전장에서 여성의 몸으로 남자 군인간부와 관료들의 눈총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생명을 살리기 위해 거의 사회운동가 급으로 살았다고 생각하는데요. 오늘날 한국에서 그녀가 이렇게 살았다면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요? 특히 남자들에게 말이죠..??